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러시아-몽골 관계 (문단 편집) === 근세 === 러시아의 문화는 몽골의 이런저런 영향을 받았는데 대표적으로 러시아어에는 몽골어 차용어와 튀르크어 차용어가 상당히 많이 포함되어 있다. 전통적인 서방 사학계에서는 모스크바 대공국에서 [[노브고로드 공국]]의 의회를 해산시킨 사례에 집중하며 몽골-타타르의 멍에가 러시아 사회를 후진화시켰다는 점을 주목하고, 다른 한편으로 제정 러시아 시대의 러시아 역사가들은 모스크바가 몽골-타타르의 멍에를 극복하면서 "아시아의 야만성으로부터 유럽 기독교 세계를 방어하는 수호자"가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오늘날 [[유라시아주의]] 역사가들은 루스 차르국의 여러 체제가 몽골의 사회 문화와 밀접함을 들어 러시아가 대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몽골의 유산이 크다는 점을 지적하는데 이는 오늘날 [[알렉산드르 두긴]]의 영향을 받은 신유라시아주의는 러시아는 원래 유럽과 다르며 몽골 제국의 진정한 후계자로서 긍지를 가져야 한다는 사상으로 재해석되고 있다. 고전적 유라시아주의와 비교하면, 신유라시아주의에는 러시아 정교회를 중심으로 한 종교적인 색채가 강해졌다. 다시 말해서 신유라시아주의는 우스갯소리 삼아 러시아 제국 아니 러시아 제국 이전 루스 차르국 시절[* 루스 차르국은 정교회를 중심으로 한 종교문명이었다. 몽골의 착취로 인해 빈곤 상태에 빠진 러시아는 유럽의 르네상스와 차단되어 있었고 수도원 전문학교 이외에 따로 대학이나 공공 교육이 존재하지 않았다. 표트르 대제 이전까지 정교회는 세속 미술이나 음악 및 턱수염 자르기를 금지하였다.]로의 회귀를 바라는 복고 사상이라는 지적도 가능해진다. 1581년 스트로가노프 가문에 고용된 [[카자크]] 일당이 [[우랄 산맥]]을 넘어 킵차크 칸국의 한 갈래였던 [[시비르 칸국]]을 무너트렸다. 카자크들은 [[시베리아]]를 [[러시아의 시베리아 정복|급속히 정복하기 시작]]하여 1638년에 [[태평양]] 해안에 이르렀고, 1690년이 되면 [[캄차카 반도]]에 카자크들의 주둔지가 건설되기 이르렀다. 시베리아 각지를 정복한 카자크들은 시베리아 내 여러 부족들에게 "야사크"라는 공납을 강요하였는데, 야샤크는 몽골어로 "규제하다" 또는 "정하다"라는 뜻의 단어로부터 유래되었다. 러시아의 시베리아 지배 방식 역시 몽골 국가 형성기의 유산이었던 것이다. 루스 차르국의 [[카자크]]들이 시베리아로 급격히 확장하는 과정에서 몽골계 [[부랴트인]] 역시 루스 차르국의 신민이 되었다. 부랴트족 추장들은 부족민들로부터 야사크를 징수해서 납부하는 일을 맡았는데, 이는 중세 당시 러시아의 공국들이 킵차크 칸국에 공납을 바치던 관계가 역전되었다고 볼 수 있다. 루스 차르국은 시베리아 남부에서는 몽골-오이라트계 [[준가르 칸국]]과 그리고 만주 방면에서는 [[청나라]]와 충돌하였다. 루스 차르국과 청나라 양국 사이에는 [[네르친스크 조약]]이 맺어졌는데, 이 조약의 결과 러시아인들은 청나라와 계속 교역할 것을 허락받는 대신 준가르 칸국의 갈단 칸을 돕지 않을 것을 보장해야 했다. 당시 시베리아 동부에서 야사크로 징발한 모피는 모스크바까지 다시 이동하는 것보다는 베이징에 갖다 파는 것이 훨씬 남는 장사였고 루스 차르국 측은 저울질을 해 본 끝에 준가르 칸국에 대한 군사동맹이나 원조를 완전히 중단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